여행 이야기

논산 명재 고택에 얽힌 사연

두타동천 2024. 8. 11. 11:26

살아남은 자의 비애悲哀
ㅡ美村 윤선거의 삶과 죽음ㅡ


1637년 정월 하순, 강화도.
한 젊은 사내가 자결한 아내의 시신 앞에서 자신도 목숨을 버리고자 했다.

심리적으로 극단의 붕괴에 빠졌을 이 젊은 사내는 그러나 모질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무서웠던 것인지, 그도 아니면 갑자기 생각이 바뀐 것인지 마침내는 그 자리를 피하고 강화도를 탈출한다.

이미 죽음으로 강화도를 사수하자 약속한 권순장, 김익겸 등은 김상용을 따라 약속대로 모두 자결한 뒤였다.

홀로 살아남은 것이다.
사내의 이름은 윤선거尹宣擧.
당시 28세 였다.

왜 이 젊은 사내는 모두들 목숨을 버려 절개를 지켰음에도 끝내 자신의 목숨은 버리지 않은 것일까? 아니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이로인해 평생을 자괴와 참담함을 안고 살아야 했을까?
살아도 산것같지 않은 '살아남은 자의 비애悲哀'는 그가 평생 지고 살아야하는 원죄였다.

죽음 이후에도 비난과 동정은 계속되어 그의 영욕은 사라지지 않아 지금  이순간, 보잘것없는 한 문외한인 필자 역시 그의 삶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슬픈 사연을 따라가보자.

후일 병자호란이라 명명된 청나라의 침략.
1636년 음 12월의 일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오랑캐라 무시한 만주족은 그 기세가 날로 사나와져 중원의 명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9년전인 1627년 조선을 공격해 왕실을 강화도에 가둬놓고 '형제의 나라'를 조약하고 돌아간 저들이었다.

이제 그 조약을 형제에서 군신, 즉 조선에게 신하의 도리를 하라 요구한 것이다.
이미 국호를 후금에서 대청大靑으로 바꾸고 황제라 칭한 저들이다.

친명배금, 즉 명나라를 숭상하고 후금을 배척한다는 이념으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와 서인 세력들은 죽어도 후금을 황제로 섬길수 없었다.

자신들이 쫓아낸 폐주 광해군처럼 중도 외교를 펼수도 없는 딱한 상황.
오직 한가지 방법은 군사력을 키우는 일이었으나, 그마저도 사방에서 역모의 기운이 있어 실행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몇몇의 인물과 소수의 병력으로 쿠테타에 성공했듯이 조정의 힘을 빌려 키운 군사로 어떤 놈이 자신들을 몰아낼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이괄의 난으로 혼비백산하여
공주까지 도망간 경험이 있는 저들로선 군사를 키우는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격이었다.

진퇴양난.
백척간두의 조선은 그렇게 군사력이 없어 청에게 두번에 걸처 조선땅을 유린 당하게 된다.
이후에도 청의 간섭으로 더 피폐해진다.

1636년 병자년 겨울,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
청의 기마병은 무서운 속도로 조선의 수도를 향해 쳐내려온다.

저들을 막아낼 변변한 군사력이 없는 조선은 다시  풍전등화.
조정은 또 피난길에 오른다.
이번에도 강화도다.
먼저 내명부의 비와 빈, 대군들을 피난시키니 얼어붙은 겨울길을 용케 뚫고 겨우 강화도에 들어간다.

이어 인조와 세자 소현 등 대소 신료들이 강화도를 향해 나섰으나 이미 청의 군사들이 길목을 장악한 뒤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이들은 남한산성으로 향한다.


여기부터는 우리가 잘아는 남한산성 전투이다.
이때 먼저 피난길에 나서 겨우 강화도에 들어간 무리들중에 윤선거 가족도 같이 있었다.
그의 작은 아버지 윤전의 가족도 함께.

그 피난길을 이끈자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이었다.
그 역시 인조반정의 2등 공신에 책록된 자.
그러나 김경징은 사태를 너무 안이하게 여겼다.

어떤 경우에도 강화가 무너질 염려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는지 군사책임자인 그와 강화유수 장신張紳은 그 상황에서도 술타령과 방탕으로 결국 민심을 잃고 저들이 배를 타고 접근하자 놀라서 홀로 도망가버린다.
장신도 인조반정의 3등 공신.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는 저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이제부턴 살육과 강탈이 있을 뿐이다.
패자의 댓가이다.

왕실을 보호하며 강화도에 입도한 윤선거는 권순장 김익겸 김상용 등과 의병을 모아 저들과 싸우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만일 강화도가 무너지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 기개는 높이 살만했으나 기개만으론 저들의 기세를 꺽지는 못했다.

강화가 끝내 함락당하자
이미 77세의 노대신인 김상용(대표적 척화파 김상헌의 형)은 화약고에 걸터앉아 스스로 불을 당겨 자폭했다.

김상용을 따라 권순장과 김익겸(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아버지)도 같이 화약고에 뛰어 들어 절개를 지켰다.
그의 작은 아버지 윤전도 자결했다.

선택의 여지없이 저들을 따라 같이 죽어야 하는 윤선거.
저들 말고도 이미 숱한 이들이 목숨을 던졌다. 특히 여인들이.
청나라의 군사들에게 농락을 당하느니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기로 한것이다.

그중에는 비겁하게 도망간 강화도 방어 책임자인 김경징의 처와 첩도 있었고,
김경징의 아버지 김류의 가족도 있었고
권순장의 아내도 자식들을 앞세워 죽이고 자신도 자결했다.
김익겸의 아내도 자결하려 했으니 만삭의 몸이라 주위에서 말려 죽지를 못했다.

그 어머니에게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이 훗날 [사씨 남정기]와 [구운몽]을 쓴 김만중이다.

윤선거도 그들을 따르려 했을것이다.
아내 이씨를 먼저 자결케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죽지 못했다.

말로는 병환으로 고생하는 아버지 윤황을 보고 죽자는 것이었다.
아버지 윤황은 남한산성에 인조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인조와 조선의 신료들은 한강변 삼전도에서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고 청의 속국이 된다.

윤선거는 이후 패전의 탄핵으로 유배를 가는 아버지를 따라 영동으로 간다.

아버지 윤황은 철저한 척화주의자.
윤선거도 아버지를 따라 척화주의자.
당시 척화가 주류였으니 저들을 딱히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가 으뜸으로 여기는 명예와 의리를 저버린 부끄러움과 참담함은 벗어낼 수 없는일.

이후 그는 고향인 노성(논산)으로 낙향해 성리학에 매진한다.
그의 스승은 신독재 김집.
김집의 아버지가 바로 예송의 대가 김장생.
김집의 호 신독재愼獨齋는 바로 중용이 강조하는 '계신공구戒愼恐懼'에서 따왔으니 그의 주자학 신봉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김집의 문하엔 조선 후기 주자학의 중심 송시열 송길준 등 쟁쟁한 인물이 많았다.

윤선거도 성리학의 대가로 불리웠다.

이후에도 그는 먼저 죽은 아내에 대한 도리인지 새 장가도 가지 않았다.
효종 현종 시대에 수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때문이리라, 추측해 볼뿐이다.

향리에 은거하며 살던 그의 인생은,
가까운 벗이자 사돈, 친척으로 겹겹이 쌓인 인연인 송시열과의 마찰로 다시 고난에 빠진다.

이른바 윤휴를 끼고 돈 사문난적斯文亂敵 사건이다.
사문이란 성리학을 뜻함이고 난적이란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적.
즉 성리학을 어지럽히는 학설이나 요설은 모두가 난적이라, 어떤 이견도 용납되지 않던 시절, 윤선거는 윤휴의 학설을 지지하고 송시열에게 이해를 구하려 한 것이다.

저 시대 윤휴는 진보주의 사고를 가진 학자.
주희의 학설이 틀릴수도 있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어찌 옛 경전의 해석이 주희, 즉 주자만이 알고 다른 이들은 모른다 할수 있겠는가?
윤휴는 자신의 생각으로 경전, 중용中庸을 주희와 다르게 해석한것이다.

주자학 유일주의자인 송시열과 그 세력들로선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는 일.
송시열에게 주자학이 종교 교리라면
윤휴에겐 하나의 학문이었다.

관점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주자학 교조주의자인 송시열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없는 반적叛敵이었다.

결국 이 일로 등진 저들은 후일 효종이 죽고 그의 장사를 어찌 지낼것이지로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는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끝내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된다.

윤선거도 송시열과 갈라선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가장 아픈곳을 파고든다.
강도江都(강화도)에서 혼자 살아남은 비겁함을 질타한 것이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패망을 지켜본 송시열로서는 윤선거를 비판할 입장은 아니었으나 이미 이성을 넘어선 상태.
이오십보로 소백보인 이 상황은 성리학이 가지는 '편협함'의 극치이다.
조선이 극렬한 당파 싸움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후에도 송시열의 편협함은 도를 넘어 뒤에는 청의 요구로 황제 홍타이지 칭송비, 일명 '삼전도 비'의 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원로 대신 이경석을 비난한다.

*
이후 윤선거는 현종 10년인 1669년 봄 59세의 일기로 고향 논산에서 생을 마친다.

송시열은 그보다 오래 살았으나 끝내 1689년 숙종 15년  83세로 사약을 받고 죽으니 어느쪽도 당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조선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자식대에도 이어져 윤선거의 아들 윤증.
윤증도 아버지를 따라 강화도로 피난 갔으나 다행히 살아남았고 일설에 의하면 그의 누이가 청에 끌려가 노비로 지내다 환속되었다고 한다.이른바 '화냥년'이 된것이니 패전의 아픔은 신분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윤증마저 송시열과 갈라서니 이들은 노론과 소론이 된다.

송시열을 따르는 세력을 서인 노론.
윤증을 따르는 세력을 서인 소론.
그러나 윤증 역시 아버지를 따라 끝내 출사하지는 않았다.

이후 이들은 끝내 화합하지 못한다.
숙종이 죽고 경종을 두고 노론과 극한 대립을 하던 소론은
경종이 일찍 죽자 연잉군(영조)를 두둔한 노론 세력에게 밀려난다.
이후에는 잠깐의 변화는 있었지만 노론 세력이 조선이 망할때까지 주류가 된다.

그 흐름은 이어져 뒷날 조선왕조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나니,
이른바 '사도세자의 뒤주 사건'이다.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 세자.

저 비극 뒤에도 조선 후기 예송논쟁으로부터 이어진 당쟁이 있었으니
사도는 소론의 세력이 후원했던 것이다.
결국은 노론의 힘에 밀려 뒤주속에서 죽게된 것이다.

임진란과 병자란 이후 무너진 사회 기강의 확립 방법에서 벌어졌던 학문적 이론異論논쟁이 비극에 비극을 더했던 것이다.

그 당쟁의 최종 승리자는 노론이었다.
이들은 다시 후일 노론 시파와 벽파로 나뉘어 대립한다.
끝없는 분파分派이다.

'한정된 벼슬자리,
넘치는 인물,
이것이 분파의 요인이였을까?'

송시열은 죽은 뒤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는다. 성인이 된 것이다.
정조 시대에는 정조의 명에 의해
[송자대전宋子大全]도 간행된다

그러나 그들만의 추앙이었다.
노론만의 추앙.그들만의 宋子였다.
반대 세력 남인들은 자신들의 강아지 이름에 "시열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풍문에 의하면 지금도 남인 세력의 주거지인 영남 지방에 가면 우리가 흔히 "백구" "해피"하고 강아지를 부르듯이 내력도 모른 채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고도 한다

宋子와 시열이.
저 간극만큼 당쟁의 후유증은 크고 아프다.

*
끝내 강화도에서의 부끄러움을 벗어내지 못하고 삶을 마쳤을 미촌美村 윤선거.
시대의 불운을 탓해야 할 것인가?

그의 죽음은 편치 못했을 것이다.


이제 한 문외한이 어줍잖은 글을 마치며
감히 아뢰나니

미촌,
당신의 비운의 삶에 위안 있을진져!


사진은 윤선거의 아들 윤증의 고택.
충남 논산에 있다.
사진: 닉네임 마로니에님의 불로그에서 빌려옴.


사진은 강화도에 있는 선원 김상용의 순절비. 김상용은 대표적 척화주의자 김상헌의 형이다.
인터넷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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