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의 유언.
"나의 관棺은 널빤지를 덧붙여 사용하라"
1689년 6월 8일 아침, 전라도 정읍이다.
83세, 노구의 정객은 여기서 생을 다한다.
객사.
인조 임금이래 효종 현종 숙종, 4대를 모신 노정객의 말로는 저때의 어지러운 정국만큼이나 비참했다.
자연사死를 이미 한참 넘은 노인은
제주 먼바다를 건너 한양으로 가는 길이었다.
노구에 제주에서의 기약없는 유배도 서러운데 남은 죄를 묻겠다고 한양으로 다시 불러올린 것이다.
국문鞫問.
대역 죄인의 죄를 더 묻겠다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우암은 죽음의 그림자를 봤을 것이다.
그러나 명예를 회복할 기회로 여겼다.
어차피 저들, 권력을 잡은 남인 세력들은 자신을 살려두지 않을것을 알았을 것이다.
업보로다.
어쩌면 우암은 자신이 목숨이 이토록 길음을 한탄했을지 모른다.
한 1~2년만 일찍 죽었어도 그 끝이 장엄했을 것이다.
서인의 세상이였으니까.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사약을 받아모신 그의 유언은 여러가지 였으나 장례절차, 이른바 예송禮訟에 이르러 자신의 장례는 주자학에 근거를 두고 치르라 말한다.
평생을 주자학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산 그에게는 당연한 일.
그러면서 저 유언을 남긴다.
자신의 관에는 널빤지를 덧붙여 사용하라고.
사연이 있다.
효종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효종은 전생애가 고난의 연속인 임금.
병자호란으로 형이자 세자인 소현을 모시고 청나라 심양으로 볼모로 잡혀 갔다.
조선시대 처음 있는 치욕.
그곳에서 제2의 국본國本인 형을 극진히 모셨다.
9년뒤 청은 명을 무너뜨리고 북경으로 천도했다. 1644년이다.
바야흐로 청의 시대가 열린 것.
그리고 형제는 볼모에서 풀려나 차례로 귀국한다.
소현이 먼저 귀국했으나 아버지 인조의 불신으로 이내 죽는다.
서른 넷. 한창의 나이.
인조의 독살설이 강했다.
그 죽음을 이어 효종은(당시는 봉림대군) 세자가 되고 왕이 된다.
적장자 우선의 나라에서 정통성의 약점을 태생적으로 갖게 된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창출한 서인 세력들은 효종의 정통성에 늘 딴지를 걸었다.
그 정통성의 약점으로 효종을 길들이려 했다.
효종으로서는 미칠 노릇.
그 딴지가 훗날 효종이 죽은 후 그의 계모 자의대비(인조의 계비)가 아들인 효종의 장사에 상복을 몇년 입느냐로 싸우게되는 예송논쟁이다.
현종 시대 내내 이 논쟁으로 지새던 저들은 마침내 숙종시대에 이르러 세차례의 환국으로 숱한 목숨이 불귀의 객이 된다.
그 차례가 기어코 우암에게도 왔으니 업보라고 밖에 할말이 없는것이다.
저들의 주장이 누가 맞고 누가 틀리고를 논한음 다시 그 '빌어먹을' 예송논쟁을 불러옴과 같으니 접어두자.
효종은 즉위하자 송시열을 불러들였다.
우암은 효종이 대군시절 그의 스승이었다.
당시 송시열은 산림에 들어간 포의, 즉 야인이었다.
병자호란으로 충격을 받은 우암은 벼슬을 포기하고 주자학 공부에 매진했다.
우암은 효종과의 인연으로 결국 정계로 돌아오고 이게 길고 긴 길을 돌아 숙종 치세 15년인 오늘 기어코 정읍에서 사약을 받게된 것이다.
효종이 북벌론자임은 누구나 알고 있으나
우암도 역시 북벌론자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학창시절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우암이 북벌론에 반대했다는 학설이 많다.
마지못해 효종의 주장에 따르는 듯했으나 실은 다르다는것이다.
또한 효종도 북벌론을 정국 주도권으로 삼았을 뿐이지 실제로 북벌 의지가 있었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1659년 기해년.
효종 10년, 그의 마지막 해.
북벌에 몸이 단 효종은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단판을 짓는다.
이른바 '기해독대' 이다.
북벌론이 정착해야 군비확장과 임금의 힘이 사는 일.
효종으로선 더이상 물러날 자리가 없었다.
저들 서인을 등지고는 아무것도 할수없는 현실.
저들은 아버지 인조를 도와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창출한 세력 아닌가.
저들과 등지면 자신의 왕좌도 불안한 일.
저들은 늘 억울하게 죽은 소현세자의 아들을 잊지않고 있었다.
이 흔치않은 기해년 독대에서 북벌을 설득하는 효종에게 우암은 듣는척하며 결론적 한마디를 건넨다.
"치자治者의 근본 도리는 우선 자신의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림에 있습니다"
즉 수기형가修己刑家 가 북벌의 전제조건이라고,
요즘말로 치면 '유체이탈'식 말을 건넨다.
즉 북벌을 논하기 전에 자신을 닦고 집안 먼저 다스리라는, '한방 멕이는' 거절인 것이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시간이 지나자 저들은 조금씩 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겁을 단단히 먹었던 것일까
어째뜬 우암의 거절에 열이 올랐을 효종은 그탓인지 머리에 난 종기가 발작을 한다.
이에 어의를 불러 침으로 고름을 빼고 치유하려 했으나, 어이없게도 잘못된 침으로 피를 쏟고 이내 급사한다.
허망한 죽음이다.
이후 북벌론은 끝났다.
효종의 한이였을까?
문제는 죽어서도 나타났다.
효종은 기록에 의하면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빼어났다고 했다.
문제는,
죽은뒤에 입궁할 관이 작았다.
미리 만들어 둔 관(조선시대는 임금이 등극하면 관을 미리 준비해 둔다고 함. 이 관을 재궁이라 한다. 죽음뒤의 궁궐이란 뜻이겠다)이 작은 변고가 생긴것이다.
신하들로서는 난감하고 환장할 일.
결국은 널빤지를 이어대 관을 늘려 입관했다.
전대미문의 일일터.
효종의 충신이었다고 자부한
우암은 이 일이 두고두고 미안했다.
그 이후 현종 숙종대에도 자신이 효종의 충신이었음을 주장했으나 인심은 우암과 같지않아 늘 발목을 잡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83세의 노구로 사약을 받은 정읍에서의
저 아침.
우암은 기어코 그 마음의 빚을 표현한 것이다.
자신이 충심으로 모신 효종의 관이 작아 불경을 저질렀으니 자신의 관도 그와 같게 하라고 한것이다.
"나의 관은 널빤지를 덧붙여 사용하라."
그의 공과를 떠나 죽음을 앞 둔 우암의 저 유언은 진심이었리라.
*
기해독대후 효종이 급사하지 않았으면 우암은 훗날 우리가 배운 역사처럼(잘못 기록된 역사일수도 있겠지만) 효종과 함께 북벌론의 기수가 되었을까?
그랬다면 저 광활한 만주땅이 조선의 영토가 될수 있었을까?
아니 북경까지 진입해 명의 잔존 세력인 남쪽 지방 '삼번의 난' 세력들과 협력해 연합국가를 세울수 있었을까?
아니면 청에게 망해 영영 조선이 없어졌을까?
내가 뒤늦게 역사책에 코를 박고 읽고 사유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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