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온천과 사도세자의 인연
천안으로 이사온 다음날, 때마침 토요일이다.
신새벽 깨어 생각했다
무엇으로 천안에서의 첫 테이프를 끊을 것인가.
잠깐 고민하다 온천욕을 다녀오기로 했다.
내 집 천안 성환에서 온양 온천이 멀지 않다.
대략 30분.
가깝진 않지만 기꺼이 가 볼만한 곳.
바로 온양온천호텔로 향했다.
지금이야 예전만 못하지만 온천하면 역시 온양온천 아니겠는가.
온양溫陽이란 이름속엔 이미 따듯함이 가득하다.
역사를 자랑하는 온양온천호텔 온천장은 명성에 어긋나지 않았다.
오래되 낡긴 했지만 낡은 자태에 켜켜이 쌓인 관록이 있어 근엄하되 온화함을 간직했다.
늙어가는 것들의 숙명인양 거기 있는 것만으로 이미 권위 있어 보였다.
새 것들이 가지는 신선함과 날카로움은 잃어버린지 오래지만 닳고닳은 넉넉함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마을앞 당산나무 같으다.
넓고 여유로운 온천탕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온천수에 대해 잘 모르지만 물이 부드럽고 알맞게 따듯하다.
입구 설명문을 잠깐 읽어보니 57도의 천연 알카리수라고 한다.
한시간여의 온천욕으로 온 몸이 개운해졌다.
천안에서의 첫 아침이 온천욕의 여유로움이었으니 천안天安이란 이름에 걸맞게 남은 날들도 이러할지니!
온양온천호텔 자리는 역사적 의미가 큼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
이를테면 내가 엊그제까지 살던, 아끼고 사랑했던 수원, 수원을 비로서 수원이게 했던 조선 정조 임금과의 인연도 각별한 곳이다.
정조의 아버지,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온양온천호텔 입구 오른쪽에 별도의 공간이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칠만한 공간.
그곳이 사도세자와 정조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괴대이다.
영괴대靈槐臺?
이름이 낯설다. 그러나 한자를 찾아보면 이미 그 이름속에 의미가 드러난다.
신령스런 홰나무(느티나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수원 화성과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머리속은 이런저런 얼개를 엮느라 돌연 바빠진다.
이런게 낯선 여행지에서 만나는 때아닌 즐거움이다.
알면 보이고 그때 보이는것은 예전과 다른.
안내문 설명에 의하면 영조는 재위 35년인 1760년 이곳 온양엘 행차했다.
온양엔 온궁이라 불리는 행궁이 있었다.
행궁은 임금이 지방 행차시 머무는 임시 궁궐.
이미 세종임금도 세조도 다녀간 곳이다.
그 행차에 사도세자(훗날 장헌세자)도 동행했다.
무예에 뛰어난 사도세자는 온궁옆에서 활을 쏘았다.
모두 과녁을 맞혔다.
사도는 만족했다.
관리를 불러 이자리에 홰나무(느티나무)를 심어 사대射臺에 그늘을 만들것을 명했다.
그때 어린 홰나무 세그루를 품品자 형태로 심었다고 했다.
그리곤 돌아갔고 2년뒤인1762년 여름 세자는 창경궁에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세자가 죽었으니 자연히 영괴대는 잊혀졌을 것이다.
실상 당시엔 명칭도 없었다.
영괴대란 이름도 정조시대 지어진 이름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환갑이자 어머니 혜경궁의 환갑해인 1795년 새롭게 정비한 것이다.
그렇게 사도세자의 흔적들은 잊혀지고 사라졌다.
당시의 집권세력인 노론은 소론을 옹호하는 사도세자를 기념하게 놔두질 않았다.
정적은 내쳐야 그들의 권력이 안녕할수 있었다.
시대의 험악함이 인간애를 용납하지 않았다.
잊혀졌던 온양 온궁 사도세자의 흔적은 엉뚱하게도 정조의 아끼는 신하 정약용에 의해 다시 조명된다.
내용은 이렇다.
훗날 다산이란 호를 가진, 우리가 익히 아는 정약용이 노론의 견제로( 겉으론 천주교 신자라는)1791년 해미로 열흘짜리 단기 유배를 갔었다.
열흘 유배는 어떤 의미가 있는것일까.
노론의 반발이 거세니 결국 화해의 시늉이 아니었을까.
그래 내 너희들 염려가 무엇인지 알겠다.
그러나 약용을 비롯한 남인의 등용을 포기할수는 없다.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을 이었으나 그대들이 그토록 배척하는 남인들의 등용없이 어찌 진정한 탕평이 가능하겠는가,하는.
그 열흘짜리 단기 유배를 마친 정약용이 올라오는길 피부병 치료를 위해 온양엘 들렀다.
그곳에서 그는 사도세자의 흔적들이 폐허가 된것을 목격하고 관리들어게 주변 정리를 요청했다.
다행히 온양군수는 노론 세상이긴 하지만 임금의 생부 유적지를 마다할수없어 잡초를 제거하고 단을 다시 정비했다.
그러나 이 일로 정약용은 노론들의 눈엣가시가 다시 되게 된다.
온양군수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유적을 정비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조는 그에게
"그 충성이 가상하다"고 칭찬했다.
겉으론 군수와 주변 관리들에게 한 칭찬이지만 사실상 정약용에게 한 칭찬이었다.
이 보고에 노론들은 경악했다.
사도세자의 유적지를 정비한것이 충성이라면 사도세자를 죽인 자신들은 역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정약용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상 인용자료 이덕일 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편)
아무튼 정약용의 관심으로 온궁의 사도세자 유적지는 다시 정비되었다.
훗날 정조는 '영괴대'라는 글을 직접 써서 내리고 비를 세운다.
아울러 세그루의 홰나무를 주변에 심게한다.
홰나무는 존귀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조정에서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일컫는 삼공(三公)을 괴위(槐位)라고 한다고도 한다.
그만큼 신령스럽고 귀한 나무라는 뜻일터.
세월이 흘러 조선이 망하고 행궁은 사라지고 온천호텔이 그자리에 앉았다.
조선의 역사를 간직했던 온궁은 사라졌으나 온천수는 여전해 사람들의 사랑을받고 있다.
이만한 역사와 섧게 죽은 왕세자의 비극을 간직한 곳이 온양온천호텔 자리이다.
내 사랑했던 수원과 그 수원을 마침내 수원이게 한 정조 임금과의 인연은 천안으로 이사 온 첫날 아침 운명처럼 이렇게 이어졌다.
수원과 온양의 거리는 멀어 예전엔 미처 몰랐으나 천안으로 오자 물리적으로 가까워진 거리만큼 내 관심으로 들어온 정조의 유적.
이를 어찌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않을수 있으랴.
아하, 이를통해
천안에서의 앞날도 유익하고 즐거움을 예견한다.창대하리라.
온양호텔 내 영괴대.
정조임금의 친필 영괴대
안내문. 혹자는 안내문에 오류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요는 사도세자가 왔었고 명했고 정조임금이 추도의 기념비를 세운건 맞는 사실이다.
영괴대 앞의 홰나무(느티나무).
온양행궁터였음을 알리는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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