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아길라의 '아낙(ANAK)' 과
이연실의 '소낙비'에 얽힌 유년시절의 기억.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잊혀지지 않는 유년의 한순간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다.
흔히 말하는 고생은 식상해서 그만두자
63년생인 내 나이쯤이면 누구나 배고품과 가난을 생활처럼 끼고 살아 그런 추억이 새삼스러울게 없다.
따라서 고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고백하자면 특별할거 없는 평범한 어린애였다.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무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지 싶다.
그냥 기억에 남는거라면 학교 가는길 비포장 신작로 옆으로 우람하게 뻗어오른 미류나무 가로수 정도다.
어린 눈에도 나이를 먹을대로 먹었을 미류나무(혹은 다른 이름을 가진 나무일지도 모른다. 내 기억에 대한 확실성이 약하다.
실은 이글도 내 기억에 얽힌 확고한 믿음이 그게 아닌 엉뚱한 것임이 밝혀져 회고하듯 써내려가는 글이다. '아낙'과 '소낙비'를 헷갈려 이글을 쓰는 조금전까지 나는 두곡이 같은 노래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의 웅장함에 여름이면 차먼지 뽀얗게 뒤집어 썼음에도,
햇빛에 반짝이는 푸르름으로 하염없이 외경심이 일었던 기억이 꽤나 강하다.
지금은 그 나무들은 다 베어지고 휑하니 4차선 아스팔트가 깔려 편하긴 하나,
어쩌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 행사가 있어 걸어가보면 너무 밋밋하고 특징이 없어 오히려 그 때가 더 좋았지 싶다.
추억은 아날로그 방식이 더 깊게 새겨지는 모양이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그러나 고기잡이보다는 농사에 더 치중하는 반농반어의 마을에 살던 내게 도시는 언감생심,
늘 멀기만 해서 그저 나가봐야 인근의 속초시가 전부였다.
그것도 한번 가자면 여간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물며 서울이라니!
서울은 나와는 다른, 그야말로 눈뜨고 코베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실제로 내 사는 곳에서 서울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촌놈이었다~^
다행히 큰도시 춘천에 친척집이 있었다.
춘천은 강원도청이 있는 행정의 중심도시.
벽지의 어린 눈에는 춘천이 얼마나 큰 도시이겠는가.
고성은 수복지역이다.
6.25 이전 삼팔선은 남쪽 양양군 현남면 기사문리에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6.25전까지는 지금의 양양군 대부분과 속초, 고성군은 북조선 인민공화국 치하의 백성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해방의 선물(?)이었다.
전쟁이 나자 아직 한참 어린 내 부모님은 어쩔수없이 전쟁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겪었고 이산가족이 되었다.
어른들은 전쟁통에 죽거나 아직 어린것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우선 피해야 했다고 했다.
한집 건너 다들 그런저런 사연들을 안고 있어 특별할것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의 상흔은 현재도 우리 삶에 상존해 여전히 아프다.
아프다, 라고 말하는건 내 부모님과 지금도 이야기해보면 시간이 갈수록 아픔의 강도가 더 강해짐을 볼수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겪은 죽음의 공포는 지금도 생생해
여기저기 아프고 세월을 이기지 못해 주위에서 한분 또 한분 세상을 뜨는것을 보면,
그때의 죽음의 공포가 더 떠올라 고통스럽다고 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너무나 큰 고통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갈수록 얼마 남지않은 생애,
그리운 혈육의 상봉은 언제나 가능할런가?
이젠 늙어 자주 아픈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의 엄마와 아버지 형제 자매들을 선명히 기억한다고 한다.
언제 한번 만날수 있을런지, 아니면 전쟁통 피난길에 모두들 사망했는지 소식조차 알길없는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만 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대는 요원할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휴머니즘보다 우선하는가?
아무것도 할수없는 자식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사고무친 전쟁 고아가 되셨고,
어머니는 어린 여동생과 둘이 할머니 손에 맡겨졌다고 한다.
잠깐이면 다시 만날줄 알았던 이별은 영영 헤어짐이 되었고 어린 소녀였던 자매는 자라서 결혼을 하게됐다.
어머니는 자라던 마을의 이웃 청년과 결혼했고 동생(나에겐 이모)은 직장을 다니던 청년과 결혼해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살다 춘천에 정착했다.
그런 사연으로 나에겐 도회지로 갈 기회가 생긴것이다.
자매의 사이는 각별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버린 엄마는 동생을 끔직히 생각했고
동생은 언니를 친정집으르 여겼다고 했다.
지금도 두분은 각별하게 지내신다.
그 영향으로 내 형제들도 이모님을 각별히 생각하고 챙겨드리려 한다.
하마터면 일가붙이 하나 없을 뻔한 내게 이모님이 계신다는건 큰 행운이었다.
가끔 춘천을 갈수 있었고 도시의 사람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서울도 실상 별것 아닐수도 있겠구나, 건방져(?)질수 있었다.
촌의 어린놈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성장해갔다.
오늘 프레디 아길라의 음악을 얘기할수 있음도
그 때의 행운, 춘천 가는 길에 얻어진 수확이다.
아니, 정확히는 프레디 아길라의 '아낙' 이라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노래가 실상은 전혀 몰랐던 이연실의 '소낙비' 라는 사실도.
사연은 이렇다.
아마도 국민학교 5학년인가 6학년 겨울 방학 이었다.
아버지와 춘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고성군 죽왕면 송암리에서 춘천을 갈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였다.
가까이는 고성군청 소재지 간성읍에 가서 춘천행 버스를 타고 진부령을 넘어 가거나,
속초 버스터미널로 가서 양양을 지나 한계령을 넘거나,
그도 아니면 강릉 버스터미널로 가서 대관령을 넘거나 해야한다.
어느 길을 택하던 세 곳으로 나뉜 영(嶺)을 넘어야 한다.
강원도는 동과 서 사이에 백두대간이 길게 누워 있는 곳이다.
이 높고 험한 산맥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영의 동쪽, 영동(嶺東)사람들과 서쪽 영서(嶺西) 사람들은 기질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강원도 사람들의 속담에 ''영넘어 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말의 속뜻은 이미 영을 넘어 내가 손쓸수 없는 일이 되버렸으니 포기해라, 하는 의미를 갖고있다.
참고로 영동은 강릉, 양양, 속초, 고성이고
영서는 원주 춘천 등이다.
정선 영월쪽은 영동과 영서와는 또다른 문화권이다.
산악을 끼고 사는 강원도에는 이처럼 지역에 따라 삶의 방식과 기질이 확연히 다르다.
바다를 옆에두고 있는 영동 사람들은 아무래도 삶이 거칠어 보이고
그래도 평지를 깔고 있는 영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그만큼 백두대간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영을 넘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진출한다는 뜻이다.
영동에서는 제 살던 곳을 떠나 큰 도시로 나가려면 반드시 영을 넘어야 했다.
물론 해안길을 따라 가는 부산쪽도 있지만 부산은 왠지 낯설었다.
그렇게 벽지의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 영을 너머 춘천으로 충청으로 경기로, 또 어딘가로...
마침내는 서울로 진출했다.
강릉에서 아흔아홉 고개를 넘어 갔던 율곡 이이 선생처럼, 혹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처럼. 아니면 이름을 미처 모르는 그 옛날 선비들 처럼...
그렇게 출세를 위해 영을 넘었다.
출세(出世),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다.
나가서 그들중 누군가는 그야말로 '출세' 를
해서 금의환향 했고 누군가는 출세한 도시에서 늙고 주저앉아 자리를 잡았고 누군가는 상처만 가득안고 쓸쓸히 낙향하기도 했을 것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났던 영너머 길은 그 끝이 다양할 것이나 공통점은 모두들 영을 너머 다른 세상으로 진출 했다는 것다.
영동 사람들에게 영은 그렇게 큰 난관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바껴 영안(嶺內)에 편안히 살던 이들이 더 크게 성공(?)해 있기도 하나, 궁핍했던 시절 영을 떠남은 고난이이긴 하나 꿈을 찾는 즐거운 길이었다.
그러할지니 춘천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었다.
다정다감한 이모가 있는 도시 춘천은 방학이면 한번씩 꼭 가고픈 도시였다.
그렇게 그해 겨울 어린 소년은 간성에서 진부령을 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겨울이었고 날이 포근했는지 비가 내렸다.
그것도 많이.
눈이 많은 지역인데 비가 내렸다.
다행이었다. 양강지풍, 통고지설 이란 말이 있을 만큼 고성은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하물며 백대간을 타고 넘는 진부령이라니.
길이 막혀 넘지 못할일은 없을것이다.
버스는 비포장 길을 달려 진부령으로 진입했다.
당시 진부령은 단선 도로였다, 고 했다.
단선 도로 였다! 고 단언할수 없는 것은 내 기억이 정확치 않기 때문이다.
노래 제목 조차 헷갈려 이글을 쓰게된 주제에 어찌 단선 이었다고 확정할수 있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건 버스는 지금의 간성읍 장신리, 즉 진부령 시작점에서 하염없이 대기를 했다.
기억에 의하면 진부령은 단일 도로라 영 저쪽, 지금의 원통면 용대리에서 출발한 차량이 이쪽에 도착해야만 우리가 탄 버스가 출발할수 있다고 했다.
아니면 혹시 갑작스런 겨울비로, 그것도 꽤 많이 내리는 비로 도로가 유실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버스는 비내리는 길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운전기사 옆에 배 불뚝 솟은 엔진룸에서 기름 냄새가 퍼져나와 히타 열과 뒤섞여 버스안은 조금은 몽롱한 분위기였다.
비로인해 창문을 열수도 없고 습기는 차고 습기를 제거하려 기사는 히타를 더세게 틀었을 것이다.
어린 소년은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감수성이 조금 발달한 소년은 그 분위가 너무 좋아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도 잊고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내리는 비와 기사가 틀어둔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버스는 언제 넘어올려나?
가기는 갈것인가?
한계령을 넘었을땐 이러지 않았는데 진부령은 이랬다.
한계령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모르는 노래는 계속 나왔고 그 노래들은 그냥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아마 설핏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차멀미 기운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리 먹은 멀미약에 취해 비몽사몽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몽롱한 중에 노래가사가 귀속에 파고들었다.
가슴을 울렸다.
비가 내렸고 비노래 였다.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처음엔 그소리만 들렸다.
조금은 날카로운 듯한 목소리의 여가수 노래였다.
미리 얘기하자면 지금에서야 제대로 알은 이연실의 '소낙비'였다.
귀 기울여 다시 들으니
어디에 있었느냐 내 아들아
어디에 있었느냐 내 딸들아
나는 안개 낀 산속에서 방황했었다오
ㆍ
ㆍ
ㆍ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끝없이 비가 내리네...
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차창엔 계속 겨울비가 여름 장마처럼 내리는데 생전 처음 듣는 노래는 자꾸 가슴을 흔들어 댔다.
나는 노래에 빠져 몽롱해졌고, 아 저런 노래도 있구나, 노래가 사람을 취하게 하는구나, 했었던것 같다.
그렇게 진부령을 넘었다.
기다림 끝에 저쪽에서 차는 넘어왔고 우리가 탔던 버스는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 영을 넘었다.
나는 이제 다른 세상으로 온것이다.
이번길은 예전의 영넘어 가는 길과 달랐다.
특이한 노래 하나를 얻은것이다.
가슴을 흔들었던 노래 하나.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그 겨울 진부령길에서 대기하며 소낙비를 만난것이다.
그러나 감수성이란 쉬이 환경에 따라 변하는 법.
춘천에 도착해 나는 번화한 도시를 구경하느라 그 노래는 까맣겨 잊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이십대무렵 나는 우연히 한 노래를 듣게 된다.
나중에 알았지만 필리핀 출신의 가수 프레디 아길라의 노래 '아낙'이 그것이다
물론 원어는 아닌 우리말로 바꾼 노래다.
우리말 제목은 '아들아'였다.
나에게 이 노래는 강렬히 다가왔다.
오랜시절 겨울비 내리던 진부령 초입에서 하염없이 영을 넘어오는 차를 기다리며 들었던 노래가 떠오른 것이다.
어딘가 조금은 다른듯 하지만 가사도 아들아,
어쩌고 하며 노래를 부른 여가수의 목소리가 비슷해서 나는 아, 그날 들은 노래가 이것이구나! 하고 확정해 버렸다.
그리고 아낙을 들을때마다 나는 유년의 그시절을 떠올리며 어린 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을 상기했다.
그 감수성이 지금 이만한 글이라도 쓸수 있는 원동력이 됐을것이다.
그러나,
착오였다.
오랫동안 알고 있던 노래는 완전히 다른 노래였다.
기억은 이렇다.
확신할 일이 아니다.
뭔가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지만 확실히 '아낙' 이라고 믿었던 노래는, 그러나 잘못된 주입이었다.
지난 주말(2019.5.4~6) 연휴를 맞아 무릎 수술을 한 장인 어른 병문안차 처가인 춘천을 찾은 나는 저녁 식사후 인근에 사는 처제 내외의 집을 방문했다.
춘천이 고향인 아내의 동생은 인근 초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늦은 밤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서울내기인 동서와
''영을 넘는다'' 의 의미를 설명하다 이노래에 얽힌 추억에 이른것이다.
나는 몇잔 술에 취해 열심히 어린 소년이 그날 겨울비 내리는 버스안에서 들었던 노래와 의미를 떠들어대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정말 까마득한 기억속에서 끄집어 올린 노래를 흉내냈다.
아낙에 얽힌 노래라 주장하며.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어쩌구..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하고.
동서는 재빨리 자신도 아낙을 안다며 인터넷을 찾아 틀어줬다.
그런데 다들 내가 흉내내는 노래와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듣고보니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노래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혼란에 빠졌다.
분명 그렇다고 알고 있던 확신에 대한 흔들림.
그러나 다른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가 노래는 잊혀졌다.
맥주 몇병에 취해 나는 깊이 잠들었고 일찍 잠이깬 나는 여전히 어젯밤에 부른 노래가 귓가에 쟁쟁했다.
혹시나 하고 유투브를 찾아봤다.
아낙을 치니 원곡과 우리말 여가수의 노래가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아들아, 어쩌구 하는 내용은 비슷한데 리듬이 달랐다.
그해 겨울 어린 가슴에 파고들었던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하는 강렬한 울림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소낙비 라고 찾아봤다
익숙한 가수의 노래가 떴다.
'잃어버린 우산'과 '목로주점' 등을 부른 이연실의 소낙비 였다.
급히 눌렀다.
그리고 아하,
내 오랜 의문은 한번에 풀렸다.
유레카!
술이 덜깬 몽롱한 의식속으로 그옛날 사십년 저쪽의 소년이 또렷이 되살아났다.
겨울비 내리는 영넘어 가는 버스 안
히터와 휘발유 냄새가 뒤엉킨 몽롱한 의식속으로 파고들었던 그 노래였다.
조금은 날카로운 듯한 음성과 철학적인 노랫말.
내 유년의 확연한 사진 한장을 찾은 기분이었다.
반복해서 듣는 철지난 노래는 그러나 각별하다.
오랜 세월 길을 헤매다 이제서야 제집에 든듯 편안하다.
기억은 이제 확신하지 않기로 한다.
내 기억은 그저 어느 한순간 강렬한 느낌이 이미지로 화해 남아 있을수 있다.
다시 찾은 노래
소낙비!
그해 겨울 열두세살이였을 소년은 이제 오십 중후반이 되었고,
찾아보니 이연실은 1950년 육이오 난리통에 태어났고 어느새 고희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다.
흘러도 유년의 기억은 쇠퇴하지 않고 더 뚜렷해진다.
내 부모님의 전쟁통 아픈 기억이 뚜렷하듯이.
소낙비는 이제 아낙과 혼재해 내 기억속에 있다.
올바르게 잡았으나 뒤섞인 기억도 나를 즐겁게 한다.
소낙비와 아낙은 이음동의어가 된것이다.
https://youtu.be/JG5APMTwxFI
https://youtu.be/WgWxsh6Rs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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