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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공부하다

두타동천 2022. 9. 5. 15:57

일본을 공부하다




최근 이 두권의 책을 연달아 읽었다.
그냥 읽는게 아니라 읽다가 모르는 건 자료를 찾아가면서 읽었다.
그러느라 꽤 오래 걸렸다.
다 읽고 나서 겨우 일본을 알거 같았다.
물론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동안 막연히 내가 알고 있었던 일본 지식이라는게 얼마나 편향되고 앝은지 깨달았다.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친일'이 됐다는 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지일知日이라고 할까?

오래전부터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고 여러책을 읽어왔다.
중국사와  조선을 시작으로 우리 역사서.
일본사도 읽어야지 했는데 선듯 읽혀지지 않았다.
내 안의 나도 모르게 자리잡은 반일 의식때문이었을까?

어째뜬 그랬다.
알고는 싶은데 재미도 없고 왠지 허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단 뜻이리라.

그런데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다보면 필연코 일본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저들은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를테면 이성계가 늙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던 14세기 말, 중국은 강대했던 몽골이 북으로 밀려나 북원이라는 유목민으로 쪼그라 들고, 홍건적의 우두머리 주원장의 명나라가 새로 들어섰는데 일본은 어땠을까?

궁금했지만 막막했다.
공부란 이럴때 해야하는데, 내 무의식속의 반일 감정은 일본 역사는 무시하라고 되뇌였다.
학교 교육의 폐해랄까?
일본은 무시하고 멀리해야 할 족속이었다.
그렇게 간간히 일본사를 부분적으로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중국사나 조선사를 보듯 열정을 쏟지 못했다.
그바람에 일본에 대해선 청맹과니(눈뜬 장님)에 다름없었다.
안다는게 대부분 매스컴이나 인터넷 자료였다.

그러다 문득,
더 늦기전에 일본사를 개략적으라도 알아보자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일본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만난 책이 일본 여행기인 '베낭 매고 돌아본 일본 역사'였다.


거기에 오래전 사 둔 청아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야기 일본사' 였다.
실은 이 책은 몇번 읽다가 접었었다.
사람 이름이 입에 붙질 않아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려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럼에도 인내를 갖고 읽었다.
그이후  센코쿠시대라 불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등장하는 전국戰國시대를 읽으면서 점차 재미를 붙였다.
이후는 읽을수록 내가 그동안 일본을 얼마나 몰랐는지, 내가 아는 지식의 축이 중국과 조선의 역사에 함몰되어 있었구나,
이제 일본의 사史까지 연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들은게 덤이라면 큰 덤이다.

일본이 오늘날 이토록 발전한 건 물론 메이지 유신이후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신했기 때문이다.
유신이란 결국 일신, 즉 새롭게 발전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 탄탄했던 도쿠가와 막부가 19세기로 접어들면서 권력 누수가 생기기 시작한다.
원인중의 결정적인건 전쟁이 없는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지금의 동경)에 막부를 연 1603년 이후 오사카 전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죽인 1615년 이후 일본엔 이렇다한 전쟁이 없었다.

에도 막부가 열리기 전까지 근 5백여녀간 일본 열도는 전쟁이 끊일날이 없었다.
12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어 천황을 꼭두각시로 만든 이후 무로마치 막부로 이어지고 그 이후 백여년간의 전쟁이 일어나니 이를 전국시대라 부른다.
여기서 이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한다.

그의 권력은 일장춘몽, 당대에 이미 끝났다.
그가 죽자 히데요시가 그토록 믿었던 이에야스는 반란을 일으켜 끝내 히데요시의 집안을 절멸 시킨다.
사쿠라 꽃처럼 화려하고 짧게, 처절하게 진 것이다.
진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지 못했다.
다시 피어나기엔 이에야스의 막부가 너무 탄탄했다.
무려 2백 6십여년을 이어갔다.
무로마치 막부에 이어 최장 기간이었다.

긴 평화가 이어지자 일본을 떠받들던 사무라이들(특히 하급 사무라이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전쟁에서 공을 세워야 출세를 할수 있는데 그들은 점차 막부의 재산관리나 하는 아전으로 바뀌었다.
병농분리와 봉건제로 다른 직업을 가질수도 없고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길수도 없었다.
나서 죽을때까지 자기 지역에서 칼 찬 아전으로 살았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무시로 찾아들어 할복이라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하급 사무라이들의 삶에 변화가 찾아들었다.
일본은 본시 문 보다는 무가 근본이었다.
전쟁에선 무가 힘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그 흔한 과거시험도 일본엔 없었다.
철저한 벼슬 세습인 나라였다.

번주의 자식은 내리 번주었고 고관의 자식은 내리 고관이었다.
하급 사무라이는 내리 하급이었고, 농부는 내리 농부, 상공인은 내리 상공인....

변혁이, 이를테면 반란이나 전쟁이 다시 일어나기 전까지는 신분의 변화가 힘들었다.

그런데....
오랜 평화가 유지되자 '칼 찬 사무라이들'이 무예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맹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들이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유입된 성리학이나 양명학등 사상서, 혹은 오늘날로 치면 인문학서를 읽기 시작했다.

독서는 사유를 불러온다.
사유는 그동안 당연히 여겼던 일들에 회의를 일게한다.
권력이 세뇌시겼던 사상에 의심이 들게한다.
그들은 조금씩 의구심을 탐구했고 결국엔 '도쿠가와 막부 권력의 근본'을 의심하게 한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본시 일본은 천황의 나라인데 왜 막부의 쇼군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가?
쇼군은 누구인가?
덴노(천황의 일본식 발음)는 누구인가?
덴노가 이 나라의 뿌리일텐테 쇼군의 권력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일테면 반체제 인사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의구심들이 커져 여론이 되자 막부는 답을 내놔야 했다.
특히 반 막부의 중심 세력인 서남쪽의 강력한 번들, 조슈번과 사쓰마번, 도사번에서 이런 의구심이 강했다.
이들은 애당초 반 이에야스 세력들로 에도 막부의 갈림길이 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에서 이에야스와 싸운 번주들이었다.

그들은 막부내의 권력엔 아예 진입할수 없어 독자적으로 힘을 키원 19세기 말엽엔 가장 힘이센 웅번으로 커져 있었다.
누수가 생긴 막부는 더이상 힘으로 저들을 누르지 못하게 됐다.

그리하여 막부는 자신들의 통치권의 이유를 내놓게 되었다.
일종의 기미 정책이라고 해야할까?
기미란 중국 한족이 주변의 오랑캐를 다루는 방법이었다.
적당히 달래고 때때로 혼을 내는.
막부도 그랬다.
본시 쇼군의 정식 벼슬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니 그들로선 우선 저 서남쪽의 끝에 있는 거슬리는 번주들을 적당히 달래려 한 것일까?

이름하여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이다.
즉 자신들은 덴로로 부터 권력을 위임받아 통치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뜻이 곧 덴노의 뜻이다, 뭐 이런 논리였다.
고민끝에 내놓은 궁색한 주장이었다.
이 논리는 뒤집으면 결국 덴노가 위임을 걷어들이면 쇼군의 통치가 무효가 되는 양날의 검인 것이다.

사무라이들은 그리하여 교토의 덴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존황尊皇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천황의 복고를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 양이攘夷, 당시에 일본을 넘보는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사상이 더해져
'존황양이론'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그동안 덴노는 교토의 황거에 틀어박혀 평생을 성밖으로 나오지 못할정도로 권력밖에 있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일본 지배층이면 누가나 기본적으로 익히는  검술마저 익히지 못했다.
평생 궁안에서 책이나 읽고 예능이이나 즐기며 사는 존재였다.
형식은 천황이 정책에 결재하는 방식이었지만 막부의 결정을 따르는 꼭두각시였을 뿐.

그런데 변화가 생겼다.
막부가 쇼군 자리를 두고 파벌 싸움이 세지고 거기에 능력이 부족한 쇼군의 등장으로 권력에 누수가 생긴것이다.
그때 서양오랑캐(미국)의 함선이 에도(도쿄만)만에 나타나 일본에게 통상을 요구했다(1853년)
페리제독이었다.

위협을 느낀 막부는 그동안 유지해오던 쇄국책을 버리고 힘에 밀려 저들과 통상을 맺게 된다
이로인해 반대파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오랜 평화가 유지되던 일본 열도에 대 혼란이 시작된 것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