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일이 커졌다.
취미로 시작한 역사 답시기 형태의 글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언감생심, 책을 내다니.
그런데 마침내 책을 내게 됐다.
기실 책을 한권 내고 싶은 건 오래된 소망이었다.
십대 후반부터 필연처럼 소설과 산문 읽기에 맛을 들여 글쓰기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지금보면 형편없는 글이지만 그로인해 나의 정신 세계는 풍요뤄워 졌다.
공책이나 원고지에 볼펜으로 참 열심히 써댔다.
여기저기에 응모도 했고 한번은 백일장에서 단편소설로 상을 받기도 했다.
또 한번은 청탁을 받고 단편 소설을 싣기도 했다
오른손 중지에 볼펜 혹이 생길 정도로
참 열심히 썼던 시절이다.
돌이켜보니 그 시절이 아득하면서 그립다.
여러모로 부족한 나는 저 시절의 치열한 책읽기와 글쓰기로 스스로의 부족함을 채워가며 이만큼이라도 삶을 영위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 이라고 했듯, 부족한 나를 키운건 팔할이 책읽기와 글쓰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이 나를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제는 지병처럼 자리잡아 뭔가를, 특히 활자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깊은 병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과 재능 부족으로 오랫동안 글씨기를 접었었다.
서른에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자 더이상 글씨기가 자신없어 졌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디선가 늘 본 것 같은 기시감의 내용과 상투적인 문체로 나는 절망했다.
고민끝에 나는 글쓰기를 접기로 했다.
재능이 없는 일에 헛심을 쏟는게 무의미하게 다가왔다.
그래, 젊은 시절 꽤나 좋아했던 소설가 김원우 선생의 글처럼 "평생 남의 글이나 읽으면서 공상이나 하고..."(아마도 이런 내용인데 너무 오래되서 작품속 문장인지, '작가의 말' 속 문장인지 헷갈린다. 이제는 가물가물 하지만 아무튼 이런 뜻의 문장이라 가슴에 품고 스스로를 위로했던 것같다.) 를 되뇌었다
이루지 못한 글쓰기를 첫사랑처럼 간직하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글쓰기를 접었고 마침내 잊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그동안 먹고 사는 일은 비교적 괜찮게 풀렸다.
월급쟁이이긴 하지만 중소기업의 임원을 역임하고 마침내는 월급 사장도 했다.
살림살이도 조금은 살만해졌다.
아이들도 무탈하게 잘 자라줬다.
모든게 순탄했다.
돌이켜보니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우수갯 소리를 한마디 하자면
글쓰기를 포기하자 답례처럼 안정된 삶이 찾아온 것이다?~ㅎ
그러나 제 병 남 못준다고 오십이 넘어서자 허전함이 강물처럼 찾아들었다.
소위 중년의 외로움이랄까?
오히려 이 시기엔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둬 경제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는데
뭔가 가슴에서 튀어나오지 못한 말들이 안달인 느낌이었다.
뭔지 알것 같았다
20대, 책읽기와 글쓰기에 빠져 들던 그 느낌이었다.
때마침 인터넷 다음 카페와 네이버 밴드 등 소위 SNS 에 열심히 들락거리던 시절이었다.
간단한 글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쉰 고개를 넘어섰고 이젠 글쓰기로 밥을 벌어 먹는 건 내 몫이 아님을 아는 나이였다.
따라서 젊은 시절처럼 잘써야 된다는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냥 일상의 글들을 생각나는데로 써보기로 했다.
그 첫 시도는 다음에 있는 '골프 싱글 쉽게되기' 카페였다.
회원이 13만 명에 이르는, 지금도 활발하게 운영되는 건실한 카페이다.
여기에 중소기업 사장을 할 때 배워둔 골프로 가끔 라운드 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쓰기 시작했다.
더러는 정성을 들여 골프 에세이 형태의 글을 쓰기도 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어라, 이게 뭔 일이지?
이런 글도 처음이지만 이런 글에 반응이 온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젊은 시절 그렇게 끙끙대며 써도 잘 안써지던 글이 욕심을 내려놓자 비교적 쉽게 써지는 것이었다.
그 뒤 장르에 구분없이 순간순간 떠오르는 단상들을 글로 엮어 올리기 시작했다.
인터넷 특성상 너무 길면 읽기가 힘들텐데 어떤 글은 길어도 찾아서 읽는 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위 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그무렵 초 중고등학교 밴드도 생겨 활발히 참여했다.
삼십년 넘어 소식을 묻게 된 동창들은 이런저런 글들에 댓글로 반응을 올렸는데
여기저기서 글이 좋다라는 말들이 들렸다.
아하, 내 안에 그동안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잠재 언어들이 이제 때를 만난 것일까?
나는 그 반응이 재미있어 또 쓰게 되고 어느새 글쓰기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주된 내용은 인문학적 단상이나 여행기, 영화감상기, 모임 후기, 가끔은 시를 흉내 낸 운문 등 장르에 구분없이 다양했다.
그러다 마침내 오늘의 책 [ ]을 내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2015 년 봄으로 기억된다.
그무렵 오래전 구입해 읽었던 소설가 최인호의 [유림]을 다시 읽고 있었다.
글을 안써도 책 욕심은 있어 이런저런 책들을 꽤 열심히 사들여 한때 아파트 한쪽벽이 책으로 덮히고도 모자라 여기저기 처박아 두던 시절이 있었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살 때였다.
이 책은 나중에 엉뚱한 사업을 한다고 덤벼들었다 어려워져서 강원도 살이를 정리하고 수원으로 이사오면서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버리거나 남들을 줘 버렸다.
오랜 기간 손 때 묻은, 이런저런 사연이 담긴 책들이 많아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젠 책도 읽지 않으리라. 어설픈 지식이 나를 고단하게 함으로.
그러나 이 약속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원으로 와 다행히 안정을 찾자 나는 다시 병처럼 책을 찾은 것이다.
어째든 그 난리통에도 다행히 살아남아 내 책장에 있던 [유림]을 다시 읽게 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해보니
2005 년에 발행된 초판 본이다.
베스트셀러였던 걸로 알고 있다.
아마 그 무렵 사서 읽었던 것 같은데 실은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었다.
나의 역사 지식이 얕은 까닭이다.
그래, 나는 그렇게 역사에 무지했다.
학교 다닐때 건성으로 배운 역사가 다였고, 거기에 역사 드라마라도 열심히 봤으면 내용이 낯익을 텐데 드라마도 잘 안보는 편이라 읽으면서 내용을 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도입부의 조광조는 많이 낯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런 예는 나중에 김인숙 작가의 소설
[소현]을 처음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려운' 문장을 끙끙대며 읽고도 도저히 시대적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훗날 병자호란을 공부하고 다시 읽은 [소현]은 결국 나로하여금 '소현, 새로운 세상을 눈뜨다' 라는 글을 쓰게 했다.
남한산성을 찾아 둘러보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후 나는 사십 중반이 넘어서면서 독서의 폭이 문학이나 철학 쪽에서 역사학 쪽으로 넓혀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보니, 소위 인문학 관련 책들이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남의 다리 긁는 것처럼 답답해짐을 느끼기 시작한것이다.
그래서 우선 조선과 중국 일본의 간단한 역사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입문서 수준이였다. 그런데 읽을수록 흥미로워 점점 폭이 넓어져 제법 전문성을 띤 책들을 찾게 되었다.
그때문인지 이무렵 다시 읽게된 [유림]은 예전과 다르게 아주 재밌고 흥미롭게 다가온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휴일, 책을 읽다 말고 나는 조광조의 묘소와 그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수원과 가까운 용인시 수지구라는 걸 알고는 그 길로 찾아 나섰다. 이른 봄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내 의지에 의해 찾아나선 특정 인물에 얽힌 첫 유적지이다.
물론 우리가 흔히 가는 문화재나 유명한 유적지는 예외이다.
단체로 우르르 가서 사진이나 찍고 건성으로 듣는 가이드나 해설사의 유적이야 왜 못가봤겠는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가 그랬던가.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 라고.
그랬다. 조광조의 묘원과 그 앞 비석에 새겨진 '절명시絶命詩' 등 유적들은 나를 조금은 흥분케 했다.
특히, 때마침 여럿이 온 일행의 해설사가 들려주는 심곡서원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마치 조광조를 대면하는 듯했다.
아하, 역사속 인물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나는 조광조의 유적을 둘러본 일을 써서 여기저기에 올렸다.
물론 단편적 역사 지식과 감상을 적은 글이다.
그런데 이 글 역시 반응이 좋고 마침내 역사까지 진출(?)했느냐는 말을 들었다.
내킨김에 평소 내가 자주 산책하던 수원 화성과 융 건릉 등 정조와 사도세자에 얽힌 사연까지 두세편 더 썼다.
때마침 정조 암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역린]과 얼마후 사도의 죽음을 다룬 [사도]가 흥행할 때였다.
그전의 글들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그간의 글들이 나의 생각을 전하는 일방적인 글이였다면 이번 글은 '팩트' 즉,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는 점이다.
공부가 필요한 글이라는 뜻이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구미가 당겼다.
내킨김에 조광조와 그의 시대를 더 깊이 살펴봤다.
그러자 지난 번 쓴 글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삼인칭으로 쓴 이 글은 어디서나, 누구나 쓰는 글이었다. 인터넷 블로그를 열어 보면 언제고 볼 수 있는 흔한 글이었다.
이래서는 전달력이나 차별성이 없을 것이다.
역사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삶과 이어져 있음을 알게 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꽤 오랜 고민끝에 나는 소설적 기법을 도입해 일인칭 시각에서 글을 쓰면 쉽고 흡인력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젊은 시절 소설을 써보겠다고 끙끙 거린 시절이 있어 크게 힘들진 않았다.
그렇게 다시 쓰여진 게 '비운의 개혁가, 정암 조광조 '였다.
부제副題로 '정암의 1인칭 화법에 기대어' 라고 달았다.
다시 여기저기에 올렸다.
지난번에 비해 반응이 더 좋았다.
일인칭으로 읽으니 마치 내가 주인공인 것 같아 흡인력이 끝내주네, 어쩌구하는 반응은 그중 가장 듣기 좋은 말들이었다.
내가 생각한 게 바로 저런 거였다.
그동안 역사는 과거속 어느 시절의 일이었고 외우기 과목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이 "학교 다닐때 역사를 이렇게 가르쳐 쥤으면 백점 맞았을 건데..." 하면서 쉽고 재미나다고 좋아했다.
그 뒤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고, 관련 공부를 하고, 를 반복하며 글쓰기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일이 커져 버렸다.
나는 삼십대 중반부터 축산물 가공유통 업에서 일을 해왔다.
앞에 언급한 중소기업의 임원과 월급 사장도 다 이 업종에서 했다.
오래전부터 우리 업계의 전문 언론지인 [미트저널 meat journal]의 편집국장을 알고 지냈었다.
대부분의 특수 언론지가 그렇겠지만 넉넉치 않은 살림에 충만한 사명감으로 일하는, 내가 우리업계에서 '외경심'을 갖고 대하는 몇 안되는 분이었다.
이 분과 모임도 같이 하고 여러 세미나에도 참여하면서 친분이 깊어졌다.
내가 '월급 사장' 을 하면서 강원도 축산물 유통업계 모임의 회장을 할 때는 상생 방안을 같이 고민하기도 했었다.
이 분과 한 모임에서 만나 식사중에 나는 뜬금없이 제안 하나를 했다.
"국장님, 미트저널에 변화 한번 주시죠.
고기쟁이라고 맨날 고기 얘기만 써서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제가 역사 답사기 형태의 글을 쓴지 꽤 됐는데, 괜찮으시면 미트저널에 연재를 해보고 싶은데 지면 좀 내주십시요!"
느닷없는 제안에 당황하던 국장님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고민해 보겠다던 국장님이 여러날이 지나 전화로 이것저것 묻더니 한번 해보자고 답이 왔다.
그대신 원고지 15매 정도로 일년은 기본적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좋습니다. 나는 흔쾌히 응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지만 자신 있었다. 내용의 완성도야 어차피 전문가가 아님에 부족할터이지만, 아마추어의 새로운 시각으로 쓸 자신은 이미 확보해 둔 상태였다.
그렇게 나의 엉뚱한 제안과 국장님의 호의로 마침내 '고기쟁이의 우리 역사 답사기' 라는 타이틀을 걸고 연재를 시작했다.
2016년 12월 호에 첫 연재물이 실렸다.
그날의 느낌이 하 생생해서 지금도 가슴 떨린다.
물론 전에도 지역 신문이나 사보社報에 글이 실리긴 했지만 내 이름을 건 연재물은 처음이었다. 내가 마치 대단한 글쟁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연재는 약속한 기한을 훌쩍 넘겨 19회를 이어 나갔다. 무려 1년 7개월.
나로서는 참 대단한 인내심과 열정이었다.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월말이면 책이 왔고 다시 글을 써서 매달 15일 까지 원고를 보내는 일들이 힘들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워낙 가둬 둔 지적 재산이 없는 나는 일년반이 지나자 좀 지쳤다.
조금씩 탈진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2018년 6월호를 끝으로 연재를 일단 접었다.
미트저널과의 인연은 일단 저렇게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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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 쓴 글들은 허공에 뜬 글 같아서 현실감이 약한게 내 생각이다.
아무리 온라인 세상이지만 아날로그 세대인 나는 활자는 왠지 종이로 보는게 편안하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온라인에 이런저런 글들을 쓴게 어느정도 쌓이자 정리를 해서 책으로 엮고 싶은 욕심이 스물스물 생겨났다.
문제는 장르가 너무 다양해 통일성이 약했다.
그럼에도 막연하게 환갑 무렵 문집 형태의 책이라도 한권 내야겠다는 생각을 아내와 주변 가까운 이들에게 농담삼아 떠벌렸다.
나를 억지로 옭아 매려는 욕심이었다.
그렇게 떠벌려두면 책임감으로라도 글을 더 써서 부족하나마 책을 한권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트저널]에 연재가 끝나자 이 글들을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버리기엔 너무 많은 공이 들었고 아까웠다.
환갑은 환갑이고 이 원고를 중심으로 역사 이야기 형태의 책을 한권 내자는 욕심이 강해졌다.
어차피 '명망있는' 전문지에 실었던 글이니 신뢰성은 어느정도 확보한게 아닌가 하는 자신감도 욕심에 한몫했다.
분량이 좀 모자라지 싶어 추가로 몇편을 더 썼다.
쓰면 쓸수록 욕심이 더 생겨 평생을 만져도 부족함은 채울길 없을듯 싶다.
이쯤에서 미트저널 국장님께 엉뚱하게 제안한 무모함을 다시 실행하기로 했다.
부족한 대로 우선은 책을 한권 묶어보자.
부족함은 더 공부해서 다음에 책을 낼 때 보충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 ]이란 책이 마침내 세상에 나오게 됐다.
나의 오랜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많이 부족하다. 익히 알고 있기에 두려움과 걱정이 크지만 가보지 않은 길로 한발짝 내미는 용기를 감히 실천해 본다.
독자님들의 혜량과 가르침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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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이지만 이 책을 내면서 고마운 분들이 여럿이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지만
우선 부족한 글을 기꺼이 연재해 준 미트저널의 권영철 국장님.
당신의 호의가 오늘 이 책을 낼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늘 감사와 외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아울러 나이 육십에 가까운 가장이 틈만 나면 방에 틀어박혀 돈도 안되는 책이나 보고 거기에 글을 쓴답시고 요란을 떨어도 묵묵히 참아주고 수발을 들어준 내 아내 홍순경.
아내의 넓은 이해와 지원이 없었으면 이 책은 도저히 세상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늙어가면서 안 아프고 속 안썩이는 걸로 이 고마움을 갚으리다~~
큰아들이 하는 일은 무조건 믿고 보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
거기에 맏사위임에도 살갑지 못해 늘 죄송한 장인 장모님.
이 분들도 내가 책을 내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분들이다.
이분들의 관심과 사랑이 내 중년을 풍요롭게 하여 글쓰기를 영위할 수 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딸 예인과 아들 의연,
엉뚱한 아빠가 또 사고 쳤다.
너희들에겐 이 책을 꼼꼼히 읽고 아빠에게 독후감을 말해줘야 하는 숙제가 하나 또 생겼다. 골치 아프지?ㅡㅎ
그러나 피할수 없는 숙제다.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이라~^^
사랑한다. 엄마 아빠의 자랑인 너희들.
졸고를 교정하고 이쁘게 꾸며준 ㅇㅇ 출판사와 인터넷을 통해 부족한 글을 읽고 피드백을 아끼지 않은 동호인들과 초중고 친구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ㅇㅇ년, 김응규.